뉴스 [프레시안] 한국과 닮은 꼴 핀란드, 복지국가 핀란드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
페이지 정보
연구소장 (112.♡.80.34) 21-02-10 10:30 조회 1,273회 댓글 0건본문
관련링크
필립 코틀러(Philip Kotler) 교수는 ‘마케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미국 대학의 유명한 교수이다. 또한 빌 게이츠, 잭 웰치, 피터 드러커와 함께 4대 비즈니스 구루(Guru, 산스크리트어로 스승 또는 어둠을 밝히는 현인)로 불리는 세계적인 석학이다. 작년 9월 그는 ‘미국은 노르딕 자본주의가 될 준비가 되어있는가?’(Is America Ready for Nordic Capitalism?)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노르딕은 우리가 북유럽이라고 부르는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그리고 아이슬란드 다섯 나라이고, 노르딕 자본주의는 다름 아닌 복지국가다.
미국 자본주의와 노르딕 자본주의
한국에서 복지국가를 말하면 철지난 노랫가락처럼 듣는 사람들이 많다. 지난 김대중 정부 때부터 들어왔던 지겨운 레퍼토리라는 식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에 살고 있는 세계적인 석학이 바로 몇 달 전에 –몇 년 전이 아닌- 미국이 살아남으려면 노르딕 자본주의, 다시 말해 복지국가로 변신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세계적 석학인 그에게 복지국가는 철지난 노랫가락이 아니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현실이다. 저성장과 불평등의 심화로 시달리는 자본주의 세계의 치료제이며 백신이라는 것이다. 필립 코틀러의 말을 더 들어보자.
그는 신자유주의 학자들이 신봉하는 낙수효과(trickle down), 즉 부자가 돈을 많이 벌면 부의 일부가 가난한 자들에게 낙숫물처럼 떨어져 빈곤에서 벗어나고 경제가 성장한다는 주장은 틀렸다고 말한다. 가장 부유한 세 명의 미국인이 하위 50%보다 더 많은 부를 보유하고 있고, 2018년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2,200명의 억만장자는 재산이 12%나 증가했지만, 최빈곤층은 오히려 11% 감소했다. 이런 사실을 들며, 그는 낙수효과인 trickle down이 아닌 정반대, 즉 가난한 사람들의 푼돈까지 부자들에게 거꾸로 올라가는 “줄어들기(trickle up)” 세상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코틀러는 신자유주의가 세계적 불황과 저성장 수렁에서 회복 불능의 상황을 만들었고, 신자유주의가 시작된 이래 “자본주의는 지난 40년 동안 서서히 자살하고 있다”는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라는 글로벌 감염병 위기까지 겹쳤다. 그는 ‘미국 자본주의가 노르딕 자본주의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미국 국민들은 혜택을 받을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필립 코틀러 뿐만 아니다. 매년 초 세계 정상들과 유명 기업인들이 모이는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의 창립자이며 주최자인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도 같은 맥락으로 복지국가 체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작년 7월에 그가 발표한 책 <코로나19/거대한 리셋(COVID-19/Greate Reset)>에서 인류는 코로나19 이전 세계로 절대 돌아갈 수 없으며 리셋(Reset), 즉 체제를 재설정할 수밖에 없다고 설파했다. 슈밥이 말한 리셋은 컴퓨터가 멈추었을 때 리부팅하면 다시 작동되는 식의 단순한 복귀가 아니다. 하드디스크를 포맷하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설치해야 된다는 뜻이다. 그는 신자유주의의 ‘주주 자본주의’ 시대에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 전환해야 한다(shifting from shareholder capitalism to stakeholder capitalism)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미국의 제46대 대통령 조 바이든도 작년 7월 유세에서 신자유주의 교주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이 주장했던, 이윤만을 추구하는 주주 자본주의 시대는 일찌감치 끝내야 했고, 이제 노동자와 지역사회와 국가에 대한 책임을 포함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 가야하며, 그것은 새롭고 급진적인 개념이 아니라고 역설했다.
이해관계자라는 개념은 1984년 미국 학자인 에드워드 프리먼(Edward Freeman)에 의해 처음 주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프리먼 본인이 2013년 자신의 논문에서 이 개념을 스웨덴 경제대학의 에릭 렌만(Eric Rhenman)이 1964년에 처음 사용했다며, 자기가 만들었다는 것은 오류라며 바로 잡았다. 에릭 렌만은 스웨덴 경제 모델, 즉 노르딕 자본주의의 핵심은 기업의 발전은 주주와 경영자의 이익뿐만 아니라 공급자와 소비자, 지역사회, 지방정부, 그리고 국가 등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공동의 목표를 갖고 실현하는 의존적 관계에 있다고 했다.
핀란드 출신 저널리스트 아누 파르타넨(Anu Partanen) 역시 <뉴욕 타임스> 칼럼(2019. 12. 7)에서 세계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라는 바퀴를 다시 발명할 필요는 없으며, 핀란드에서 노르딕 복지국가를 보면 된다고 조언한 적 있다.
새로운 복지국가 버전이 중요한 이유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위기에 빠진 지금 새로운 복지국가, 즉 복지국가4.0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우리 인류는 근현대사에서 복지국가1.0 버전부터 노르딕 자본주의로 상징되는 복지국가3.0 버전까지 진행해왔다.
1880년대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근대 복지국가의 출발인 복지국가1.0을 시작했다. 1930년대 미국을 대공황에서 벗어나게 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은 복지국가2.0 버전이다.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은 소득세, 상속세 등 세율인상으로 국가재정을 확충했고, 노동 3권을 보장하고 최저임금법을 시행했으며 빈곤퇴치를 위해 실업보험, 장애자 급여, 은퇴자 연금 같은 사회보장제도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를 기초로 미국은 1980년대 신자유주의 광풍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40년 넘게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이란 역사를 써갔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미국의 레이거노믹스와 영국의 대처리즘으로 상징되는 쌍두마차가 이끄는 신자유주의 광풍 속에 복지국가2.0은 영미식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무참히 무너졌다. 지난 40년은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이 ‘재난적 자본주의(disaster capitalism)’라고 압축적으로 표현했던 시간이었다. 신자유주의와 주주 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휩쓸면서 복지국가는 크게 훼손된 채 역사의 흔적으로만 남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유럽 북쪽의 노르딕 국가들이 1930년 대공황 이후 자신들만의 사민주의 복지국가 모델을 소중히 가꾸고 있었다. 1970년대 석유위기를 전 세계와 함께 겪고,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광풍의 영향으로 1990년대 금융위기 등 많은 어려움이 닥쳤어도 그들 나름의 버전인 노르딕 자본주의를 다듬어 갔다. 노르딕 자본주의는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노후보장연금, 유급휴가 등의 보편적 복지를 기초로, 사회적 대타협과 함께 높은 투명성과 신뢰도를 바탕으로 기후변화에 대응하면서 지속가능한 발전 공식을 찾아냈다. 바로 복지국가3.0 버전이다. 노르딕 자본주의는 기존 선진국이 급격한 기술발전과 세계화로 인해 중국과 동남아 등 저임금 국가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는 시대에서도 북유럽 국가의 꾸준한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포스트코로나 시대 인류는 노르딕 자본주의의 새로운 버전인 복지국가4.0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코로나19라는 팬더믹 이후 모든 것을 재설정해야 한다는 클라우드 슈밥의 통찰처럼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되고 있다. 복지국가4.0은 미국의 제43대 대통령 조 바이든의 당선과 함께 자본주의의 핵심 거점인 월가(Wall Street)에서부터 태풍의 눈처럼 조용하게 일어나고 있다. 월가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자산운용회사 블랙락(BlackRock)은 운용자산 규모가 7조8000억 달러(8600조 원)규모로 세계 1위이다. 올해 1월 블래락의 최고경영자(CEO) 래리 핑크(Larry Fink)는 투자한 기업 CEO들에게 편지를 보내 ESG(환경(E), 사회(S), 거버넌스(G)) 경영을 다시 강조하면서, 특히 기후변화 대응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온실가스를 배출하며 탄소중립을 소홀히 한 기업에 대한 투자를 거둬들이겠다는 경고도 우회적으로 전달했다.
코로나19 위기는 몇 년 전 빌 게이츠도 경고했듯이 환경 파괴로 인해 정글 속 깊이 잠들어 있던 바이러스들이 인간과 접촉하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기후위기와 코로나19 사태를 떼어놓을 수 없다. 블랙락의 래리 핑크도 올해 CEO 편지에서 탄소중립을 뜻하는 ‘제로 (zero)’라는 단어를 19번이나 언급하며 투자 기업들에게 기후변화 대응과 온실가스 배출을 경계했듯이, 새로운 위기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은 돌이킬 수 없는 세계적 흐름으로 강고해지고 있다.
복지국가3.0을 완성한 노르딕 복지국가들은 기후변화 대응에 선도적이다. 기후변화 대응의 강력한 무기인 재생에너지 비율이 스웨덴은 50%에 이르렀고, 핀란드 역시 41%로 2018년 목표인 38%를 초과 달성했다. 기후변화 대응에 적극적인 유럽연합(EU) 국가들의 평균은 18%로 노르딕 국가들의 성취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마저도 한국의 5.8%와 비교하면 멀찌감치 앞서 달리고 있다. 온실가스 배출 제품에 세금을 매겨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탄소세는 핀란드가 세계 최초인 1990년 시작해 30년 가까이 실시하고 있다. 핀란드는 2029년 화석연료 완전 퇴출과 함께 2035년 탄소중립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새로운 복지국가=노르딕 경험+포스트코로나를 대비한 추가적 2%
앞서 핀란드 저널리스트 아누 파르타넨이 비슷하게 언급했듯이, 우리는 복지국가4.0을 처음부터 발명할 필요가 없다. 핀란드 등 노르딕 국가가 완성한 복지국가3.0을 갖고 와서 거기에 포스트코로나 시대 대비를 위해 필요한 2%만 더하면 된다. 특히, 나는 핀란드를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1990년대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이 무너진 후 한국 진보진영 일부에서 대안으로 노르딕 모델을 잠깐 주목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사민주의 복지국가 모델의 원조 국가인 스웨덴만 보았다. 스웨덴은 역사적으로 북유럽 강국이었고 사민주의의 토대가 강력해서 우리의 현실과 맞지 않았다. 그렇지만 바로 옆 나라인 핀란드는 다르다.
핀란드는 우리와 쌍둥이라고 착각할 만큼 많이 닮았다. 오랜 가난과 피지배 역사(스웨덴 650년, 러시아 108년)를 갖고 있다. 이웃 노르딕 나라들과 달리 혈통에 아시아 유전자가 섞여 있고, 언어체계도 우리와 같은 우랄알타이어계다. 한국전쟁과 같은 동족상잔의 이념 전쟁을 1918년에 겪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산대국 소련과 두 번에 걸친 전쟁을 치렀고, 이후 폐허 위에서 수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