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수교국은 미국이 아니라고?!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은 우연인지 불행인지 세계 강대국 특히, 세계 4강 사이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약하면 당하는 국제라고 하는 전쟁터에서 경제력이나 국력을 강하게 성장시키고 유지해야 하는 DNA가 잠재되어 버렸죠. 지구상에 존재하는 나라는 누가 기준을 삼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유엔(UN) 기준 195개국, 올림픽 기준 206개국, 월드컵 기준으론 211개국입니다. 이렇게 많은 나라들 사이에서 한 국가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외교권’이죠. 각 국가는 외교권을 이용해 많은 나라들과 수교를 하고 이권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수교란 국가 사이에 교제를 맺는 것을 말하며, 국가간에 수교를 한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 관계를 이룬다는 것에 그 의미가 있다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말하고 있죠. 우리나라의 수교국은 2020년 기준 191개국이며, 북한과 동시수교를 맺은 국가는 158개국에 달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나라와 수교를 맺고 외교활동을 진행하고 있다는 말이죠. 안타깝게 우리나라와 수교를 맺지 않은 ‘#미수교국’은 쿠바, 시리아, 모나코 3개국입니다. 사실 쿠바는 우리나라와 1949년 수교를 체결했었지만, 1958년 쿠바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현재는 단교한 상태죠. 시끄러운 중동에 자리한 시리아는 북한과 오랜 혈맹국 사이로 지내고 있기 때문에 서로서로 수교에 대해 부정적입니다. 프랑스 남쪽에 있는 매우 작은 국가 모나코는 우리나라와 연간 교역 규모가 미비하고 정치적 이해관계도 전혀 없기 때문에 수교를 맺는 것에 큰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많은 국가와 수교를 맺으면 그만큼 우리나라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겠죠. 손해를 보는 수교도 있겠지만 이득이 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할 겁니다. 확실하게 말이죠. 우리의 역사 속에서 미국이라는 나라는 다양한 역사적 흔적을 남기며 오늘날까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한국전쟁을 치른 후 정식 독립국가로 인정받게 된 이후에는 반드시 수교를 해야 하는 국가임에 틀림이 없었죠. 하지만! 대한민국의 첫 수교국가는 의아해게도 미국이 아닌 ‘#중화민국’ 또는 대만(臺灣)이라는 사실입니다. 현존하는 아시아의 가장 오래된 공화국(1912년)이기도 한 대만은 100년이 넘는 장수 공화국이죠. 1949년 1월, 우리나라는 중화민국과 수교를 맺고 앞서 말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서 다양한 교류를 진행했습니다. 뭐 사실 거창하게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이지, 사실은 반공이나 특히 안보 목적이 강했죠. 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이후부터 중국이라 함)’ 즉,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중국을 견제하는 측면이 더 강했으니까요. 1990년대 이전까지는 ‘중국’이라는 표현은 대만(중화민국을 한국 한자음으로 읽으면 대만이 됨)의 준말이었고 대륙에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 공산당의 준말 ‘중공’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 이후 중국이라는 표현을 대만이 아닌 오늘날 대륙에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바꿔서 부르기 시작했죠. 우리나라와 대만의 수교는 꽤 오래된 44년을 유지해왔습니다. 예전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은 대만정부와 왕래하며 외교활동을 유지해 왔죠. 하지만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는 대륙의 중국은 섬에 있는 대만을 정식국가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자신들만이 오로지 ‘중국(china)’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세계의 많은 국가에게 대만과 단교하라는 압력을 행사했죠. 당장 대만과 국교를 끊지 않으면 자신들과 어떠한 경제적 협력도 없을 것이란 협박을 내세워 대만과 단교를 강요합니다. 1971년 10월 25일, 제1967차 유엔 총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 대표권 귀속문제를 표결에 부치게 되죠. 여기서 중국은 안전보장이사회의 5대 상임이사국이라는 지위를 얻었고, 대만은 국가로서 국제법적 지위를 박탈당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엔 상임이사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인데 이 중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대만이었다는 사실이죠. 대만은 유엔에서 스스로 탈퇴했고 그 뒤로 많은 국제단체에서 쫓겨나듯 사라져갔습니다. 우리나라가 대만과 단교를 해야만 했던 시대적 배경에는 크게 정치와 경제 그리고 역사적 인식을 들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노태우 정권이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와의 외교를 성과로 내세우고 있었고 피날레처럼 보일 수 있는 중국과의 수교를 은밀히 추진했죠. 당시 우리나라 내에서는 대만을 동맹국가로 인식하고 중국과 수교를 반대하는 여론이 상당히 강했지만, 노태우 정권의 선택을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또한 많은 국가들이 대만과 단교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는 바람에 우리나라와 대만의 단교를 비난하는 국가는 없었죠. 또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중국을 ‘#경제적’으로도 놓칠 수 없었으니까요. 오늘날 중국은 세계 경제 2위라는 성장을 보이고 있으며, 많은 인구수는 다른 국가의 기업들에게 풍부한 소비자 인구를 통한 이익 발생이라는 아주 멋진 메리트(merit)를 보유했죠. 그리고 대만은 아시아에서 일본과 우리나라에 이어 근대화에 성공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한 동아시아의 네 국가에 뜻했던 말이 있습니다. 바로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죠. 이 네 마리의 용은 우리나라, 홍콩, 싱가포르 그리고 대만입니다. 2005년을 기준으로 이미 우리나라 경제는 대만을 앞섰지만, 당시 대만을 뛰어넘고 싶었던 우리나라의 욕심과 질투가 작용했을 겁니다. 앞서 말한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도 있지만 우리와 또 다른 한 가지가 크게 작용했을 겁니다. 우리나라와 대만은 비슷한 역사의 상처와 경제성장의 본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역사적_인식’부분은 정말 많이 다르고 다르죠. 대표적으로 일본 식민 시절을 거치고도 대만 국민들은 일본에 대해 굉장히 우호적입니다. 어느 정도로 친일감정이 있느냐면 대만의 전직 총통이 일본에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할 정도이니 굉장하죠. 일본이 자신들을 통치할 때 국가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많은 산업수단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오늘날 대만이 잘 살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은 우리나라와 상당히 큰 인식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만 국민들에게 저질렀던 일본의 만행을 잊고, 감사해하고 있다는 인식은 정말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우리가 꼭 잊지 말아야 하는 역사적 사실도 있습니다. 1932년 8월 김구와 첫 만남을 가진 대만의 ‘#장제스’ 총통은 우리나라의 임시정부 지원을 약속하였고, 1940년 창설된 임시정부 광복군은 장제스의 도움으로 기초 군사훈련을 받게 됩니다. 장제스는 카이로회담에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처칠 영국 수상을 설득해서 ‘일본 패전 후 조선의 독립’ 선언을 이끌었습니다. 대만이란 국가는 어쩌면 우리나라가 현재 존재할 수밖에 없게 많은 도움을 준 국가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들죠(물론 당시 대만은 대륙을 되찾기 위해 미국의 군사적 도움이 간절했지만... 때마침 터진 한국전쟁... 음...).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 중국과 소련이 주축이 된 전쟁에 대만이 참전한다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 날 것이라 판단되어 대만의 참전을 반대했죠. 대신 대만은 물자와 재정을 지원하는 국가로 참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1945년 8월 15일과 1948년 8월 15일. 우리나라 국민 중 이 두 날을 기억하지 않는 국민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은 죽음으로 내몰려 온갖 고통과 고문으로 멍든 시대를 끝내고 새롭게 시작하는 국가기념일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또 한 날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905년 11월 17일, 러시아와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으로부터 우리의 외교권 빼앗긴 ‘#을사늑약’이 있었던 날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약 35년간의 긴 식민지를 경험하며 ‘우리’라는 존재를 국제사회에서 철저히 사라지게 만든 순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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