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슨과 테슬라 그리고 계백과 김유신 세기의 라이벌
"에디슨vs테슬라, 계백vs김유신 세기의 라이벌"
오늘날 인류가 이만큼 살기 위해서는 사람들끼리 경쟁이라는 싸움을 지속하면서 가능했습니다.
누구와 누구의 싸움은 볼만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쟁자들도 있었죠.
때로는 발전적이고 비전적인 경쟁 속에서 신인류의 물건들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류는 곧 경쟁 속에서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죠.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경쟁자들은 서로를 존중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경쟁자를 존중한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이 대표적으로 누구인지 알아보고 싶어졌을 겁니다.
라이벌!
경쟁자라는 말보다 라이벌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법한 존재들.
지금부터 이들에 대해 그냥 궁금해서, 검색질을 해보겠습니다.
그냥 막 검색질을 하면 끝이 없을 터.
동양과 서양으로 나누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노력왕 에디슨 VS 천재 테슬러입니다.
공교롭게도 이 둘은 스승과 제자사입니다.
잘 모르셨다고요? 괜찮습니다.
이제 천천히 알아 가면 되는 거죠.
1884년 테슬러는 당시 잘나가는 발명가 에디슨의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둘의 인연은 시작이 됩니다.
테슬러라는 이름은 요즘 아주 핫해졌죠. 바로 미국 전기자동차 회사인 테슬러사의 설립자입니다.
에디슨은 전기를 발명했고 전기를 활용한 많은 발명품을 만들어냅니다.
대표적으로 투표 기록기, 백렬전구, 축음기, X-ray, 영화촬영기 등등 많은 발명품에 특허를 받아 판매를 합니다.
덕분에 충분한 금전적 보상을 누리게 되죠.
테슬러가 에디슨과 마찰이 생길 건더기가 없어 보인다고요? 그럼 이제 마찰이 시작된 곳을 찾아보죠.
갈등!
당시 에디슨의 전기는 직류방식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설명을 하자면 전기제품에 직접 전기를 제공하여 사용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건전지를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교류는 직류로 향하는 전기를 다양하게 나눠서 사용하게 해주는 방식이죠. 한전에서 받아쓰는 전기를 생각하면 됩니다.
DC와 AC라고도 말합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에디슨은 직류방식으로 전기제품을 만들었습니다.
테슬러의 눈에는 이 직류방식보다 교류방식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이 되었죠.
전기를 사용하는데 직류보다 교류가 투자비도 덜 들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전기를 사용하게 하자는 취지였습니다.
하지만!
테슬러의 건의는 에디슨에게 씨도 먹히지 않았죠.
에디슨은 테슬러의 건의를 거절합니다.
에디슨은 직류방식의 발명품을 팔아야 했습니다.
그래야 돈을 많이 벌수 있으니까요.
테슬러의 말처럼 교류방식으로 바꾸게 되면...
그동안 자신이 투자한 돈을 쉽게 회수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결정을 했습니다.
아마 에디슨이 돈독이 올랐던 모양입니다.
이에 상심한 테슬러는 에디슨 회사를 박차고 나왔죠.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딴 ‘테슬러코일’이라는 회사를 창업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이 둘의 전쟁은 시작됩니다.
그런데!
에디슨은 테슬러가 개발한 교류방식의 전기가 위험하다며 소리를 냅니다.
“교류전기는 사람이 접촉만 해도 사망할 수 있다.”
그리고 얼마나 무서운지 샘플로 교류방식으로 사용되는 전기의자를 만듭니다.
오늘날 사형수들에게 사형을 집행하는 전기의자의 발명가가 에디슨이라는 말씀!
아무튼 에디슨과 테슬러는 각자의 회사에서 우리 실생활에 필요한 많은 발명품을 만들어냅니다.
에디슨은 평생 약 1,000여개의 발명품을 만들어냈고 테슬러는 약 10,000여개의 발명품을 만들었죠.
차이가 있다면 에디슨은 발명하는 족족 특허를 받았고 테슬러는 특허를 받지 않았습니다.
테슬러의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는 군요.
이론이 부족했던 에디슨은 엄청 많은 실수와 실패를 경험하며 물건을 발명했고 원래 수학과 이론에 능했던 테슬러는 실수 없이 많은 발명품을 만들어 냈다고 합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에디슨의 명언이 생각나는 군요.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만들어 진다”
왜 이런 명언을 남겼는지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그래도 우리 생활에 큰 도움을 준 두 명의 발명가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내봅니다.
이제 서양의 라이벌을 뒤로하고 동양의 라이벌을 찾아 떠나보겠습니다.
동양의 라이벌은 에디슨과 테슬러의 시대보다 훨씬 뒤로 돌아갑니다.
바로 우리나라의 역사에 있는 분들이기 때문이죠.
때는 바야흐로 660년.
공터도 그냥 공터가 아닌 넓은 들판에 수십만 명의 군사들이 대립하고 있을 때.
누군가 고함과도 같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돌격! 돌격 앞으로!”
이 소리와 함께 흙먼지를 일으키며 많은 병사들이 피를 흘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와 자식들이 노예가 될까 염려된다.”
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애국심으로 싸운 불운의 남자.
5천 명의 수비병력으로 5만 명의 공격병력과 싸운 백제의 장수.
바로 계백장군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 기쁘지 않을 수 없었던 또 한 명의 남자.
화랑정신을 앞세워 당대 최대의 라이벌인 계백장군을 굴복시킨 장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신라의 장수.
김유신장군.
신라는 북쪽으로는 고구려, 서쪽으로 백제가 자리한 국가였죠.
너무 강한 국가들이 자신들 주변에 있으니 국경지역은 오전과 오후 점령국가가 바뀌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특히 백제의 의자왕은 신라를 자주 공격해 영토를 확장했죠.
이에 뿔난 신라는 백제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습니다.
하지만 단독으로 백제에게 싸울 힘이 없던 신라는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무려 16년 동안 빌고빌고 빌었던 일이었죠.
그래서!
마침내 나당연합이라는 최고의 연합군을 구축하게 된 신라는 백제정벌을 위해 출정하게 됩니다.
당시 백제의 수도는 사비성.
오늘날의 충남 부여군입니다.
당나라 군대와 한곳에서 만나 함께 사비성을 공격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당나라 군대를 이끄는 장수는 소방정이라는 아주 무서운 장군이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나당연합은 깨지고 말 것이 자명했죠.
인천 부근에 있는 덕물도라는 곳에서 당나라 군대와 신라군은 만나기로 약속을 했죠.
하지만 약속한 날짜까지 신라군은 도착하기 어려웠습니다.
가장 빠른 길로 향하는 것은 바로 이곳을 통과하는 것이었죠. 그곳이 어디냐?
바로!
황산벌입니다.
김유신장군은 당나라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황산벌로 향합니다.
신라의 연예인 화랑들과 함께 말이죠.
황산벌 전투는 영화나 드라마와 다르게 딱 하루 만에 끝난 전투였습니다.
왜냐?!
앞에도 말씀드렸듯이 백제군 5천 명과 신라군 5만 명의 싸움이었습니다.
쉽게 10대 1의 싸움인데 백제군이 이길 리가 없겠죠.
국가의 존립도 존립이지만 당대 최고의 장군은 누구냐는 자존심이 걸린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계백과 김유신.
승자와 패자는 정해졌지만 이 둘 모두 국가를 향한 애국심은 굉장했습니다.
계백이 죽자 김유신은 공허한 심장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표현을 했다죠.
서로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전쟁으로 남은 두 명의 업적은 박수 받을 만 합니다. 라이벌은 멋진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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